▲ 김영대 교수
“우리 공무원들 디자인마인드 좀 심어주시오”

김 시장의 첫마디와 더불어 처음 면담은 시작되었다. 기실 망설이던 나에게 큰아들이 “아빠, 방위였잖아. 군에 가는 셈치고 2년 국가를 위해 봉사하세요”라는 말에 결심을 굳혔다는 내 설명에 시장은 크게 웃으며 그 아들 한번 보잔다.

행정부시장은 모든 일에 디자인을 체크하잔다. “직원들 말 안 들으면 시장님 대신 제가 혼내겠습니다” 옆에서 국장도 거든다. 이때부터 ‘디자인 마인드’는 나에게 화두가 되었다. 2008년 여름 이렇게 대구시장의 직속부서로서 도시디자인총괄본부가 탄생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1980년 영남대 조경학과에 전임이 된 후 이렇게 장기 휴직하기는 처음이다. 사실 대학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던 2000년 내부적 진통이 있었고 게다가 겸무교수를 하던 건축디자인대학원이 대학사정으로 문들 닫고 결국 자동적으로 건축학부 소속이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가 들 무렵 본부장 자리는 하나의 돌파구인 셈이었다.

교수직은 현실사회 문제에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고 교육을 통해 키워낸 학생으로 하여금 대처토록 하는 일종의 간접참여다. 그런데 이 본부장직은 도시디자인 행정의 지휘를 도맡아 의도하는 바를 직접 실천할 수 있다는 큰 기회로 보았다. 다만 마음 한구석 회의는 가시지 않았다. 교수로서 외유 아닌가? 그래도 조경학은 실천적 학문인만큼 이 외유는 곧 나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큰 기회로 보고 싶었다.

첫날 함께 임용장을 받은 국장들과 일종의 신입 신고삼아 인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문득 만만치 않은 상황이 하나씩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먼저 기자실. 인사하는데 누군가가 한마디를 하란다. 난 시장의 뜻을 잘 받들어 열심히 하겠노라고 했더니, 기대와 회의가 반반 섞인 표정이다. 시선이 집중되면서 질문공세는 이어졌다. 결국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 이전에 활발하다던 도시디자인위원회가 미미하게 끝난 상황에서 굳이 교수를 임용할 필요가 있는지? 조직은 그대로인데 교수전문가라지만 과연 혼자 와서 되겠는지? 또 성급하게 도시디자인 방향도 묻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숙제를 미리 들은 셈이었다. 시의회에서도 의원들 대부분 기대가 크다며 은근히 눈길로 한번 잘 해보라는 눈치였다.

본부장 취임과 더불어 닥친 여러 변화는 그 자체로서 이미 앞날의 긴장과 사건과 관계를 예고하고 있었다. 조직생활이 거의 처음이라 생소하였다. 관료조직사회는 군(軍)보다도 더 계급사회라고 해야 할 정도가 아닐까싶다. 일주일에 두 번은 아침 8시30분에 시장과 부시장 주재회의가 열리는데, 정기적 보고에 따른 지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자리는 국장자리 끝이었고 아직 회의 분위기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언론보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책이나 해명을 늘 준비하였고, 시의회가 열리면 만사를 제쳐두고 대처해야만 했다. 만일 평교수가 총장에게 강의와 연구할 일을 매일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실행해야 한다면, 그런 업무형식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본부로 와보니, 비록 총괄부서라 하나, 직원은 처음 겨우 16명. 사무관 3명과 기술직이 대부분으로서 일개 과 수준이었다. 그래도 격식을 갖추고 첫 훈시를 하였다.

“대구시에 디자인이라는 신선한 피를 수혈하러 왔다. 그리고 여러분은 수혈을 받고 건강해진 후 곧 전부서 직원에게 헌혈을 해야 한다” 이어서 디자인마인드, 도시디자인특성, 도시디자인행정, 조직의 능력과 한계, 발상전환, 포부 등을 곁들이면서, “각자 결과는 모두 내 책임이다. 앞으로 이 본부를 통해서 자기발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첫 반응은 대부분 반기는 얼굴이었다. 이어서 주무계장은 수시로 “어떻게 할까요?”한다. 그 자리에서 즉답이나 판단을 내려줘야 했다. 디자인과 관련되는 경우 참으로 어려웠다. 왜냐하면 디자인이 그렇게 쉽게 척척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 대학원 조교로서 몇 년 고생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의 고된 업무가 큰 밑천이 되었으니 점차 큰 어려움 없이 꾸려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주 열리는 여러 회식자리에서도 왕년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니, “교수님 대단하다”는 약간의 의외적인 놀람과 호의적 시비가 섞인 소리를 듣게 되었다. 몸을 던지듯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대작하며 어울린 탓이었다. 특히 기자들과의 회식은 좋은 소통기회였다.

곧바로 닥친 일은 먼저 조직운영을 꾸리고, 목표체제를 갖추는 것이었다. 대구의 도시디자인을 추진하는 큰 틀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비전과 목표체제를 구성하고, 2년간 추진할 업무를 나열하였다. 이슈는 대구의 상위 비전과 목표 설정이었다. 사실 예산확보가 더 큰 문제였으나, 이때만 해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무튼 도시디자인의 이론적 근원이자 철학으로서 영남의 뿌리를 찾아야했다. 이미 예도로 정립된 전라도의 사정과 비교하며 경상도의 선비문화를 풀이하기 시작했다. 행정은 가시적이 되어야 했다. 큰 그림 중 전략으로서 ‘행복을 키우는 도시디자인’이란 작은 슬로건을 만들고 디자인기준을 구성하였다.

시장에게 처음 업무 보고하는 날, 난 땀에 절었다. 굳이 자평하자면, 성공적. 허기야 내용이 앞으로 잘 하겠다는 청사진이었으니 크게 토를 달 필요가 없었다.

 

 

▲ 대구광역시 도시디자인 전략

 



가을에 접어들면서, 나는 대구의 도시를 디자인하는 일을 총괄하는 중책이라고 스스로 다독거려야 했다. 그러나 본부예산도 부족했고, 직원들의 전문성도 아쉬웠다. 조직을 키워야 할 판이었다. 문제는 시간. 그래서 넓게 시정 전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소관업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닥쳤으니 당시 ‘행정초자’로서는 보이질 않았다.

진행 중이거나 추진 중인 프로젝트를 거론하며 담당이나 해당 과장 혹은 소관 국장에 말하며 디자인도 신경을 쓰자며 잘 하자고 했더니 대개들 반기듯 했으나 내심은 달랐던 것이다, 당시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국장과 얘기는 잘 통했으니 “아, 그래요?” 하면서 알아보겠다든가 잘 알겠다는 식이었다, 허나 그 다음부터 달라졌다.

과장에게만 가도 검토해보니 어렵단다. 예산이며 온갖 사정과 상황을 말하며 부득이 다음에 하는 식이 되고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본부직원들도 쓴 표정이었다. 회의를 다녀오면 본부장이 또 무슨 생소한 일을 가져오나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시장은 달랐다. 안되면 알아서 쟁취하라는 식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여러 주문과 지시와 바람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몇 달 후 간부회의에서, 정 국장이 본부장은 외부에서 모셔온 교수분이고 또 연배가 있으시니 상석으로 자리를 옮기셔야한다고 주장했다. 대체로 동의한 듯 난 자연스럽게 마지못한 척 기획실장 다음 자리로 옮겼다. 사실 조직순서로선 그렇게 될 순 없었다. 그런데 놀라게도 다음날 매일신문에 이 내용이 기사화되었다.

“도시디자인, 행정의 중심에 서다” 본부장 나 자신보다도 안팎의 사람들이 나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대 교수 이력

학력
한양대 건축학과 졸업(1974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석사(1977년)
미국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조경학과 석사(1989년)

주요경력
영남대 조경학과 전임교수(1980년~)
영남대 건축디자인대학원 교수(2003년~)
영남대 건축학부 교수(2008년~)
전. 대구광역시 도시디자인총괄본부장(2008~2012년)
전. (사)한국조경학회 수석부회장(2000~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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