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대(영남대 교수)
공무원이 된 후부터는 “이 시설은 왜 이렇게 만들었나?”, “저 디자인은 좀 이상한데?” 등등 점차 주변에서 들리는 말에 매우 민감해졌다. 때로는 이웃사람도 관심을 보이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오히려 환기시켰다. 그러다가도 “그 디자인, 본부장님 실력이 그 정도 밖에 되지는 않을 터인데요?”하며 기자는 은근히 찔러본다. 심지어 시의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조형물을 두고 본부장능력을 지적받을 때는 답답했다. 제 책임은 하나이며 나머지는 아니라고 구차하게 변명할 분위기도 못되었다. 억울할 입장이었으나 그냥 바보처럼 미소만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보니, 안팎으로 이율배반적이었다. 밖에서 볼 때는 도시디자인총괄본부장이 대구시의 모든 디자인은 다 총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허나 안으로는 달라서 그만한 실권이 없었다. 시장직속부서임에도 불구하고, 각 부서의 호응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본부내의 업무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실재업무에서 당시의 조직과 능력으로서는 모든 도시디자인관련행정을 다룰 수 없었다.

그러나 총괄입장에서 보니, 어느 프로젝트든 관련디자인결과가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비록 주된 기능을 잘 해결하더라도 디자인이 뒤떨어지거나 경관적으로 조화롭지 못해서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부실한 경우도 많았는데, 특히 설계입찰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누구나 최상의 디자인해결을 추구하지만, 보통의 디자인이 우리의 도시를 차지하고 있으며, 외면당한 디자인꺼리도 많이 남아있다. 문제는 잘못된 디자인이다. 의외로 공공영역의 것에는 이런 디자인의 오류 또는 미숙함이 많다. 나는 이점에 착안하였다. 최대한 비록 타부서에서 추진하더라도 디자인오류를 최대한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만든 것이 ‘디자인협의제’였다. 김 시장의 지시와 기획관리실장의 지원에 따라 업무협조형식으로 만들었다. 디자인협의제는 대구시행정전반에 디자인개념을 적극 도입하여서 도시디자인총괄본부에서 설정하는 디자인시책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도시디자인의 수준을 향상시키려는 일종의 디자인행정 형태이다. 대구시와 8개 구군에서 시행하는 일정규모 이상의 공공공간, 공공시설물, 공공시각매체 등을 대상으로 하여 사업을 시행하기 전에 미리 디자인에 관한 사전검토를 받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대상은 건축위원회나 경관위원회를 거치지 않거나 해당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사업들이 많았는데, 들여다보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단위면적이나 단위개수이기에 넓게 반복되는 경우도 있고, 연차사업으로 반복되거나 단계사업으로 선도적이 될 경우도 있다. 게다가 공공사업은 그 자체가 파급효과까지 있기에 더욱 자체사업으로 본보기가 되어야했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제대로 디자인되어야한다.

현실은 디자인을 마지못해 감초 다루듯 했다. 질보다는 양이었다. 디자인행정의 현장업무에서 문제 하나는 대개 공무원이나 참여전문가가 시민의 눈높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다. 다양한 디자인선호를 형식적인 조사나 관주도의 공청회로 풀 수는 없으며, 전문가도 자칫 독선으로 빠질 수 있다. 늘 NGO가 만능일 수도 없고, 의사결정권자가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시민수준을 속단하거나 “디자인우민화”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따라서 성공적인 도시디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함께 공동목표를 설정해두고 수시로 이를 길잡이삼아 조정해나가는 일이다. 시민과 더불어 공동의 목표를 찾아가는 일 아닌가. 그래서 디자인협의제는 대구의 디자인시정목표를 따라가는 행정수단의 하나로 활용하고자 했다. 특히 자칫 단체장이나 특정 아류에 휘말리는 것을 막고, 도시 전체로 보아서 일관되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이 균등히 함께 공유하기에 “디자인 집합미” 효과를 최대한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경제적이다.

본격적으로 디자인협의제를 운영하면서 본부의 디자인전문계약직의 일이 많아졌다. 협의신청을 받으면, 먼저 그들이 검토해서 결재라인에 따라 본부장결재를 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소신껏 일하는 것이 순탄해보이지 않았다. 전문가라 해도 아직 미숙한 점도 엿보였을 뿐만 아니라 포괄적 검토능력도 한계가 있었다. 직속상사의 지적은 물론 사업부서와의 관계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다. 그것은 프로젝트 내용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협의에 응한 부서의 상사가 직접 본부계약직을 다룰 때는 최악이었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에 지쳤고 아침에 결재를 받으러 오면 술 냄새가 아직도 가시지 않는 경우도 보았다.

사업계획과 협의도서를 보면, 장단점이 한눈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협의결재는 계속 주고받은 내용검토를 해야 하므로, 실력까지 바닥이 보이는 경우마저 있었다. 업체전문가가 동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한계는 자주 목격되었다. 심지어 디자인설명을 듣다보면, “과연 이 사람이 전공자 맞나?”싶었다. 그런 경우 재협의조치는 쉽지 않았으나 부득이했다. 결국 내가 직접 스케치를 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본부장이 절대 그러면 안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관점은 본부장이 그렇게 해서 모범을 보여야한다는 상반된 의견도 있었다. 나의 행동은 정말 신중하고 싶었다. 그 여건 내에서 부득이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디자인의 모든 부문을 망라해서 지적하고 수정 보완시켰다. 실재 배후자문인 전공교수와 무언의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게다가 적지 않은 졸업생들을 마주해야할 때도 생겼다. 노파심인지 모르나 처음 느꼈던 그들의 희망과 성원이 점차 실망과 불평으로 바뀌는 것만 같았다. 너무 단호하게 하고 있는지 자성할 때가 많아졌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디자인협의 때문에 업무가 지체된다는 볼멘소리가 들였다. 심각한 지적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김시장이 언급할 정도였다. 내 탓이 컸다고 생각한다. 아마 디자이너라면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솔직히 남의 디자인을 재판하듯 협의 조정한다는 일 얼마나 어려운가! 이 사건이후 나는 스스로 분발을 다짐하면서, 어떤 협의든 일주일이내 마무리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디자인소통의 애로도 없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각 부서에서 점차 긍정적이 되었다. 아예 디자인해달라는 식으로 본부로 위임하듯이 떠맡기는 경우도 생겼다. 나로서는 너무 즐거운 비명이었지만, 직원들은 황당하고 고생이었다. 남의 일을 뒷정리한다는 푸념도 있었다. 자칫 결과가 예상보다 좋게 나타나지 않을 때는 본부도 같이 힘든 꼴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때 다음단계로 구상한 것이 “디자인지원제”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시행했을 뿐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

아무튼 하나둘 만들어가면서, 나는 힘이 통한듯해서 비록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았다. 도처에서 조성된 사업을 보면 힘이 났다. 그리하여 4년 간 약 200여건 협의실적을 이룬다.

디자인협의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체장의 강력한 지원과 전문가의 능력을 갖춘 협상력이 필수적이다. 결국 본부장의 리더십이 관건이다. 디자인은 마지못해 쓴 약에 가미되는 감초가 아니라, 절대 없어서는 보약이 될 수 없는 절대필수감초가 되어야 한다. 나는 적지 않은 곤경에 처하면서도 막상 가장 중요한 디자인행정의 하나를 실천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그러나 어느 자리에선가 “적을 많이 만들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씁쓸하고 곤혹스러웠다.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어느 것이 더 큰 가치인지. 디자인을 타협하는 일은 위험하다. 자칫 전문성의 포기가 된다. 원안을 망치고 누구도 책임못질 기형을 만드는 “공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어느 조경업체사장이 농담처럼 읊은 진심어린 항변은 아직도 내 가슴속 여운으로 남아있다. “그러하면, 우리는 굶어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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