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원 청강조경 부회장

눈부시리만치 화사한 만추의 한날이었다. 찌든 도심을 떠나 풍요로운 황금벌판과 홍시 같은 따사로운 햇볕, 달콤한 바람을 피부에 느끼며 떠나는 가을여행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하나인가?

태안반도 국립공원 끝자락에 있는 천리포 수목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해의 푸른 파도가 ‘우~윽 ~’, ‘철~석’ 숨져간 어부들의 영혼을 달래는 듯 쉼 없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었다.

여느 수목원과는 달리 분명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는 설립자 민병갈 원장(본명 Carl Ferris Miller , 미국), 그의 철학이념과 자연에 대한 순수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미군장교였던 그가 한국의 자연과 문화에 심취되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62ha(18만평)의 바닷가 모래언덕에 1만5000여 종의 식물을 갖춘 거대정원을 조성 했고, 50여 생애를 바쳐 조성한 수목원과 사랑했던 식물들을 제2의 조국 한국에 내려놓고, 81살 나이에 수목원 한 귀퉁이 나무 밑에 조용히 묻혔다.

한국정원의 특징인 소박함과 서양의 특징인 실용정원을 결합하여 현지 지형과 기후에 적합한 식생을 조성, 전통과 실용이 공존하는 미적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목원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3대 철학이 있었으니, 정원에 대한 가치관이 절대 상업적이지 않고, 보는 사람중심의 미적 추구보다는 식물중심의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 모습,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로의 이상향을 가졌다는 점에서 ‘세계 12번째 뛰어난 수목원’ 에 선정되었다.

어떻게 보면 덜 다듬어진 숲 속을 보는듯하여 다소 정돈되지 않은 인상을 주나, 그가 처음 천리포의 땅을 샀던 4마지기의 논도 볼 수 있고, 그토록 좋아했던 개구리 울음소리와 초가집 풍경도 볼 수 있는 정겨운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어 그 옛날의 고향풍경을 보는듯했다.

오전 탐방을 끝낸 우리는 인근 소나무 밑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처음 서먹했던 분위기는 식사를 하면서 얘기꽃으로 한결 친숙한 지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 신두리 해안 사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약 100만m2에 달하는 사구는 바다와 육지의 생태계적 균형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몇 만년의 세월을 안고 쌓여진 하나의 신비한 모래언덕이라 할 수 있다.

짭짜름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출렁이는 파도소리를 노래 삼아 가족 또는 연인과 같이 걷는다면, 더없이 좋은 관광코스가 되리라 여겨졌다. 좀더 관리에 힘쓰고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 곳이기도 하다.

사구가 형성되면서 자연히 생성된 두웅습지가 주변에 있다. 2007년 람사르습지(이란의 람사르 협약)로 지정된 곳이었으며, 이러한 사구와 습지의 훼손은 곧바로 인간과 동식물의 생태계의 불균형으로 생물의 삶이 붕괴로 이어진다 하니 자연 그대로의 보전이 절실한 곳임을 일깨워 주는 곳이기도 하다.

낙조로 곱게 물든 서해바다를 뒤로 두고 귀경길에 올랐지만 어둑어둑해진 저녁이 되자 고속도로엔 귀경 차의 행렬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졸린 눈으로 서울을 출발했지만, 오늘 우리는 충만된 새로운 지식과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추억을 담은 채 분명 어제와는 같지 않는 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 있었다. 오다가다 만나도 십년지기가 되고 막걸리 한잔을 같이 마셔도 백년지우(百年之友)가 된다고 했거늘, 이번 여행을 통해서 만난 지인들과의 소중한 만남은 또 하나의 덤이었다.

언제나 전국의 아름답고 의미 깊은 곳을 선정하여 여행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한국 조경신문사에 감사를 표한다.

나는 죽어서 하나의 바위가 되리라. 애련에 물들지 않고, 비바람에 깎이고 둘로 쪼개어져도 소리하지 않는 하나의 바위가 되리라는 유치환의 시 한 구절을 생각하며, 우리 인간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나 위대한 창조물을 이룰 수 있는가를 다시금 되새겨보는 뜻 깊은 하루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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