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아 (성남시청 공원과 주무관·조경기술사)

7월 12일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뚜벅이 답사에 드디어 참가하는 날이다. 그것도 우리 엄마와 언니와 세 모녀가 함께 하는 내 인생 첫 나들이를 말이다.
불심이 가득한 엄마에게 우리나라 10대 사찰 중 하나인 부석사를 구경시켜 주고 싶었고 문화해설사 과정을 공부중인 언니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신청을 했는데 역시 뚜벅이는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안겨 주었다.

아침 7시 40분 출발했는데 고속도로가 막혀 30분이 지연되어 영주에 도착하였다. 풍기IC에서 가천대 김덕삼 교수님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고, 풍기가 고향이신 김덕삼 교수님의 동행은 우리를 한껏 들뜨게 해주었다.
지연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하여 이른 점심을 한 뒤 부석사로 올라갔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때 삼국이 통일된 후 의상대사가 창건한 호국사찰의 대표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오래된 목조건물이며,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 무량수전의 앞마당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던 부석사의 5개의 국보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 하고 넘어가겠다.
첫 번째 국보 무량수전은 구조적으로 안정되어 보이기 위하여 추녀의 네 귀를 8각 활주가 받쳐주고 있으며 기둥에는 배흘림이 되어 있고 지붕에는 귀솟음 수법이 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수법들은 건물 전체를 한층 더 돋보이고 안정되어 보이게했다. 무량수전 바로앞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내내 건물의 웅장함과 위용에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 국보 무량수전앞 석등은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연꽃무늬와 보살상의 조각이 정교하고 화려하여 국내에서도 가장 우수한 조각물로 인정받고 있다.
세 번째 국보 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은 소조불상으로, 소조불상이란 우선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덧붙여 만드는 것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소조불상 가운데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한다. 무량수전의 건물이 앉은 자리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소조여래좌상은 동향을 바라보고 있어 특이하다. 아마도 동향을 하고 있어 안정되어 보이고 금빛을 더욱 빛낼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번째 국보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산으로 100m정도 떨어져 있는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맞배집으로 전통적인 주심포식의 과도기적 건물로서 양식과 기법에 특이한 점이 담긴 작은 건물이다.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의 진영을 안치하고 있다.
다섯 번째 국보는 조사당 벽화로 조사당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범천 등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문화해설사가 해준 설화 두 가지를 빠트리고 넘어갈 수 없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설화와 선비화에 대한 설화이다.
의상대사가 10년간 당나라에서 유학을 한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대사가 탄 배는 벌써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이 곳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 곳에 살고 있던 많은 도적떼들이 방해하자 선묘가 용으로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물리쳤다 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불렀으며,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남아 있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해지면 이 바위가 정말 떠 있나를 실험해 본 내용이 이중환에 택리지에 있다고 하니 모두 확인해 보기 바란다. ^^

두 번째 설화는 조사당 처마 끝에 자라고 있는 선비화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이 조사당 처마 안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을 꽂으며 이 지팡이가 싹을 틔어 자랄것이며 나무가 죽지 않으면 자신도 죽지 않을것이라고 말했다는 선비화(골담초)가 자라고 있다. 이 나뭇잎을 먹으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소문에 나무가 훼손되어 지금은 철책으로 손을 못타게 해 두었는데 이 모습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조경인으로서 수목 보호를 꼭 저렇게 해야 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자식을 낳게 해주는 나무라는 해설서의 말을 찰떡같이 믿고 나무에 돈도주고(?) 딸에게 예쁜딸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셨다.


부석사를 뒤로 하고 두 번째 방문지 소수서원으로 이동하였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며,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기도 하다. 서원은 오늘날의 사립 중고등학교이며 선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간이다. 그래서 건축물의 종류에도 제사지내는곳, 공부하는곳, 기숙사로 나뉘며, 소수서원의 건축물 배치는 동학서묘 배치에 따라 동쪽에는 학교기능을 하는 강학당이 자리잡고 서쪽에는 제사 기능의 문성공묘가 자리잡고 있고, 일신재, 학구재, 장서각 등의 옛건물이 있었다. 서원 담장밖에는 수려한 경치와 어울려 시연을 베푸는 경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서원 뒤에는 계곡옆으로 서원을 끼고 돌아나오는 호젓한 산책길이 나 있고 중간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유명한 백운동(白雲洞) 경(敬)자 바위였다.
세조3년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참화를 당하게 되었고 죽계천에 시신이 수장되면서 몇키로 밖 마을에 피가 모였다하여 ‘피끝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고 한다. 밤마다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학생들이 무서워 하자 주세붕 선생이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경(敬)자 위에 붉은색을 칠하고 제사를 올렸더니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였다.
소수서원에서는 문화해설사 설명을 듣고 시간이 모자라 서원 주변을 되돌아 볼 시간이 없었던 점이 약간은 아쉬웠으나 소수서원 입구의 흐드러지게 핀 원추리 군락지 전경, 김덕삼 교수님의 소수서원의 19금 나무 소개, 백운동(白雲洞) 경(敬)자 바위 근처 디딤돌에서의 단체사진은 그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 수 있었던 것 같다.
답사의 마지막 도착지는 소백산에 자리 잡은 희방폭포 및 희방사 트레킹 코스이다. 소백산은 입구부터 돌계단의 연속으로 약간은 험난한 트레킹 코스가 아니었나 싶다. 분명히 배석희 기자님이 왕복 40분 코스라고 했는데 가도가도 끝이 없는 돌계단 뿐이었다. --;
힘들어 포기하려는 엄마를 챙겨가며 한참을 올라가니 희방폭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방폭포는 소백산 연화봉 밑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몇천 구비를 돌아돌아 흐르다 이곳에 이른다 하니 그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폭포를 보며 땀을 딱은 뒤 더 올라가면 희방사가 나온단다. 가지 말까 잠시 고민했는데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쉬워 되돌아 갈 수가 없어서 있는 힘을 다해 걸음을 재촉해 본다. 희방사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두운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며 은은한 종소리로 유명한 희방사 동종이 보관되어 있다고는 하나, 관리가 안되어 방치된 듯 한 사찰로 보였다. 문화재 보존 및 관광객을 위하여 좀 더 섬세한 관리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백산 트레킹은 힘든 코스였지만 소백산의 정기를 느끼고 자연경관을 만끽할수 있었다. 한국조경신문 김부식 대표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세 모녀가 여행을 와서 보약을 먹은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할 것 같았다. ^^

마지막으로 김덕삼교수님 모교인 풍기초등학교 앞 식당에서 저녁으로 묵은김치닭볶음탕을 먹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맛있다고 하였다. 나 또한 담백한 저녁 식사 덕분에 소백산 트레킹후 방전된 체력이 다 회복되었다. 김덕삼 교수님께서 풍기에 와서 인삼향을 맡고 가야 한다며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홍삼엑기스를 맛보게 해주셨다. 하루 종일 동행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이번 여행은 30명이 채 안되는 뚜벅이가 참가하였으며 어림잡아 회비는 버스전세비용으로 다 들어간 것 같았다. 이렇게 적자나는 여행을 기획하고 그 맥을 이어가는 한국조경신문에 죄송함과 감사드린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 많은 조경인들이 참가하여 힘들 실어 주시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뚜벅이 후기를 마친다.

박정아(성남시청 공원과 주무관·조경기술사)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