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양 소쇄원(명승 제40호) <사진제공 문화재청>

담양 소쇄원(명승 제40호)은 조선 중기 양산보가 기묘사화로 그의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된 이듬해 세상에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하고자 조성한 별서로 그의 행장에는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수 좋고 경치 좋은 무등산 아래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소쇄원이라 이름하고 두문불출하며 한가로이 살 것을 결심하였다”고 그 조성취지를 알리고 있다.

소쇄원은 옹정봉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중심으로 터를 잡고 담을 둘러 독특한 정원 영역을 형성한 것으로 광풍각, 제월당, 초정, 대봉대, 매대, 난대, 상지와 하지 등의 정원시설과 함께 오곡문과 토석담, 물레방아, 석가산 등의 점경물, 대나무와 매화, 동백, 오동, 소나무, 배롱나무 등 식재를 통해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인공요소의 배치가 잘 어우러진 한국전통조경에 있어 전무후무한 뛰어난 정원양식이라 할 수 있다.

소쇄원에 대한 첫 기록은 김인후의 소쇄정즉사(1528)로 소쇄원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소쇄정(瀟灑亭)’이라 밝히고 있으며, 송순의 면앙집에 기록된 행력에는 ‘중종 37년(1542)에 소쇄원(瀟灑園)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초기 소쇄정의 모습은 대나무 숲과 계류로 둘러싸인 작은 규모 정자로 이후 정원 모습을 갖추게 되는 시기는 1542년 이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쇄원은 송순, 김인후, 김언거, 정철 등 인척관계의 인사들이 교유했던 장소로 호남 가사문학 기반 속에 발전했으며 양산보의 후손들이 지역 사림들과 교유하고, 당대 거인과 관계를 형성하였다. 계류가의 암반과 오곡문 일대 화계에는 송시열이 쓴 ‘소쇄원(瀟灑園)’각자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慮)’라는 문구가 남아 있는데 이는 송시열과 소쇄원 인물들과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하며 이 밖에도 100여 편이 넘는 소쇄원 관련 시문이 전해지는 등 호남문화권 내 영향력은 확대되었으며 단일 정원에서 이와 같은 사례는 드문 일이다.

담양 소쇄원은 조선시대 대표적 별서이자 500년 넘는 세월 동안 인문활동이 축적되어 정원문화의 전범을 이루어 온 곳으로 정원 조영 이래 오늘날까지 조경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교과서 구실을 하고 있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소쇄원 보존관리에 대한 학술연구를 진행한 바 있으며 전통조경 분야에서도 꾸준히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소쇄원에 대한 조경분야의 가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증대되고 있다.

▲ 담양 소쇄원(명승 제40호)

<자료제공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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