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을 조경의 시선으로 집대성하고자 5명의 수원시 공무원들이 발품으로 탄생시킨 ‘왕의 정원 수원화성’. 최재군 수원시 공원녹지사업소 푸른조경팀장이 지은이를 대표해 책에 얽힌 뒷이야기를 전했다.

▲ '왕의 정원 수원화성' 지은이들(왼쪽부터 김선주, 나진화, 김새별, 채수연, 최재군)

지은이 모두 녹지경관과, 문화유산관리과 등 수원시 공무원들이다. ‘왕의 정원, 수원화성’ 기획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수원시에 소속된 공직자로서 우리시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고민했다. 그 중에 하나가 세계유산 수원화성 마케팅이고 이를 위해 조경가의 시각에서 수원화성을 평가하고자 기획되었다. 지금은 수원화성 자체가 정원이며 공원이다. 그런 관점에서 수원화성과 정조대왕을 조명하게 되었다. 

수원화성을 정조의 내면과 조경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수원화성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주변 반응은 어떠한가?

수원화성은 주로 정조와 실학 등 역사적 관점에서 평가했다고 본다. 이를 조경가의 시각으로 정조의 효심과 백성을 위한 내면 사상이 조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평가해보고자 했다. 이는 새로운 시도이며 수원화성의 새로운 가치를 찾는 일로 주변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수원화성은 조경적 가치 외에도 조선후기 도시계획과 경제, 사회문화, 군사, 건축, 사회복지 등 다양한 관점에서 가치를 담고 있다. 이러한 가치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평가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사료가 방대하다. 집필과정 중 가장 큰 애로사항은?

정조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태어난 창경궁 경춘전부터 땅 속에 묻힌 화산 건릉의 조성에 이르기 까지 살펴보고자 했다. 가장 큰 애로사항은 잘못된 정보가 너무 많이 펴져 있다는 것이고 이를 확인하는 작업이 힘든 과정이었다. 한 예로 ‘수원성복원정화지(경기도, 1980)’에 수원화성의 북쪽에 있는 연못 발굴조사 결과 연못이 두 개인 쌍지(雙池)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인정하고 원고를 작성하였는데 뒤에 잘못된 기록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런 작업들이 어려운 과정이었다. 수원화성은 앞으로도 연구나 고증이 계속되어야 한다.

정조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학문의 융복합 연구가 활발했다. 조경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정약용 같은 주변인물과의 학문적 교류나 영향 등 총체적 결과물로 보인다. 어떠한가?

당시 조경이 독립된 학문체계나 관리조직이 완비된 것이 아니라 정조과 정약용 등 주변 인물과 조경적으로 어떠한 교류를 하였는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다만 정조는 수많은 글을 남긴 인물이며 그 속에 조경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나 문헌이 무수히 많다. 다산 역시 전국을 유람하여 수많은 정자와 정원, 사찰을 찾아 시인묵객과 교류하였다. 정조가 다산과 함께 한 18년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관계가 설정되었다. 정조는 다산을 신임하여 수원화성 설계를 맡겼고 조선후기 실학자와 기술자 들이 수원화성 축성에 참여하도록 했다. 조경적으로 정조는 신하들과 많은 교류를 이어가는데 그 대표적인 장소가 창덕궁 후원이 된다. 정조는 이곳에 유상곡수연을 풀고 신하들과 학문과 시를 나누며 정원문화의 여유를 즐겼다. 수원화성 정조와 신하, 실학자의 노력으로 사회의 모든 분야가 융합되어 탄생한 당대의 종합예술이다.

수원시 공무원으로서 책 발간은 의미 깊어 보인다. 향후 계획이 있다면?

수원시에 몸담고 있는 공직자로 수원을 위해 조그만 일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세계유산 수원화성을 더 깊이 공부하고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다. 또 그 동안 축적한 수원화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회를 마련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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