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조경사회가 벌써 3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특히 지금까지 이렇게 잘 이끌어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3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창립 초창기의 활동에 대해 기억을 떠올려 봤다. 하지만 세월이 세월인지라 기억이 선명하지는 못하다. 그리고 나는 기업인 겸 기술사였고 학회 활동도 했으며, 조경수협회 회장도 지냈기 때문에 그냥 조경분야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는 기억은 뚜렷하지만 그중에 어느 부분이 딱히 조경사회 분야 일이었는지 구분하여 떠올리기 어려웠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듯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한국조경사협회 창립기에 대한 이미지는 ‘오휘영’(당시 국무총리실 행정조정관)과 ‘한국일보 13층’ 그리고 ‘회현동’(에덴녹화산업 사무실)과 ‘실무자들의 만남’으로 응축할 수 있다.

당시 조경발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모여 모임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그런 의견들이 모여 한국조경사협회(한국조경사회 당시 명칭)가 만들어졌다. 역시 그 중심에는 보이지 않게 오 조정관이 있었다. 1980년 6월21일, 한국일보 13층에서 한국조경사협회 창립식을 열었다.

조경사협회는 기술사와 기사 등 면허(자격증)를 가진 이들의 모임을 말한다. 학회는 학술발전을 도모하고 조경사회에서는 실무중심의 모임을 갖고 조경업계의 발전을 이뤄내자는 회합의 첫 시작이었다.

초창기 조경분야 발전에 큰 공이 있던 분들은 오휘영, 민경현, 윤국병, 장문기, 서원우, 안봉원, 김귀곤, 안동만 등 많은 이들이 의견을 공유했고 조경 발전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서울시 녹지국 김실 과장도 기억에 남는다. 김실 과장 역시 조경사협회 모임에 개근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던 회원이었다. 왜 이분들 뿐이겠는가, 그 많은 분들을 다 열거 할 수 없어 쉽게 떠오르는 몇 분만 적어 본다.

창립식은 항상 모이던 멤버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 초기에 활동은 다양하지는 못했지만 조경기사 명단을 입수해 주소록을 만들었고 총회 진행 전 관련 안내문을 우편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협회 회원으로는 창립기에는 65명이였으며 12월말 기준 71명이 가입했다.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민경현 회장은 이학박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세칭 조경담당비서관실에 근무했던 민 박사는 청와대를 나온 이후 설계사무소를 열었다. 특히 그는 조경기술발전에 관심이 많았던 분이다.

1980년 중반에 조경사협회는 산업인력공단 자료를 참고해 조경기사 명단을 뽑았고 이들에게 가입 관련 우편물과 협회보를 보냈다. 참고로 당시 조경기술자는 기술사 11명·기사1급 306명·기사2급 792명으로 총 1109명이 배출 되었다.

장문기 2기 회장은 당시 국내 유일의 종합조경회사였던 한국종합조경 기술부장이었다. 장문기 회장이 속해있던 한국종합조경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이 회사는 반관반민 기업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했고 한국의 조경공사를 도맡아 해왔던 기업이다.

70년대에는 청와대의 입김이 컸다. 한국종합조경 역시 난립된 조경업체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리더업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청와대의 의지 속에 만들어진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조경분야가 발전해가기 시작했고 종합조경 면허도 풀려 11개 종합조경 업체로 확대됐다. 내가 경영했던 에덴녹화산업(주)은 11번째 업체였다. 사실 그 때는 우리나라 조경을 11개 업체가 나눠 했으니 지금 정도로 경쟁이 심하지 않았지만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만족할 줄 모르는 속물이 아닐까 싶다.

나는 토목을 전공했고 서울시 토목 기술공무원을 거쳐 미국 건설회사 설계사로 일했다. 그 당시에는 서울시청 건설과 가로계에서 조경업무 전부를 담당했던 시기다. 70년대부터 조경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조경기사와 더불어 기술사 면허를 받았다. 또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보니 1·2기에 연속으로 부회장을 맡게 됐다.

한국조경사협회 모임은 1기에는 우리회사인 에덴녹화산업 회현동 사무실에서 진행했지만 2·3기대에는 서대문으로 이사해 사무실 한 칸을 제공해 협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그 곳에서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내가 사우디아라비아 지사 활동으로 출장 가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바쁜 시간에 쫓겨 이 사무실에 대한 관심이 소원해졌고 내 출장 중에 우리회사 기획실에서 전화가 와서 조경사회 사무실이 늘 비어 있는데 우리 설계실은 너무 비좁으니 그 방을 사용해야 겠다 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가볍게 승낙했다. 일에만 쫓기다 보니 회장과 상의해야 할 예의를 망각했던 것 같다. 이 점은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고 또 서원우 당시 회장께 미안한 일로 기억에 남아 다시 한 번 사과드리고 싶다.

그리고 고인이 되신 민경현 전 회장, 장문기 전 회장, 김실 전 부회장에게 묵념을 드린다.

조경사협회 모임은 주로 저녁시간에 이뤄졌다. 친목회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때론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건설업법 개정에 뛰어들어 대응했던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조경사회와 학회 그리고 업계가 모두 힘을 합해 대응에 나섰지만 건설업법을 변화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토목인이었던 나는 토목분야의 공직자나 회사원에 많은 지인이 있었는데 규모면이나 예산면에서 토목·건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 조경분야가 초라함을 느꼈고 예나 지금이나 거대한 토목분야에서 조경사의 일자리나 예산을 할애해 주는 데는 무척 인색했다.

또 정부기관 조직에 조경직을 둬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조경기사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출한 바 있다. 당시 조경학과 대학은 20여개였고 전문대학 역시 비슷한 수였다. 따라서 이 전문 인력들의 일자리 대책이 시급했다.

조경사협회와 조경학회는 조경기사 일자리 창출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80-90년대에는 건설부 건설행정과에서 이를 다뤘었는데 언젠가 담당 국장을 만나서 조경 특수 면허를 살리고 조경전문가의 일자리도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들의 생각은 별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한국전쟁 후 고아원을 예로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전쟁으로 고아가 많아지면 정책적으로 고아원을 설립해야 하듯이, 수요에 비해 많은 인력이 배출되고 있으면 정책적으로 그 인력을 소화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더니 의외로 그 말은 설득력이 있다고 받아줬다.

사실 조경분야 회의가 많아지기에 너무 많아져서 혼란스럽다는 뜻으로 “조경연합회를 만들어야 겠구먼” 하고 농담했더니 모두 껄껄 웃었다. 말이 씨가 된다 하더니 그 농담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되, 어찌되었던 조경 단체 5개가 뭉친 조경연합회가 생겼고 오휘영 초대 회장이 추대됐다.

조경연합회 모임에서 1992년 IFLA 세계대회를 유치했던 것 역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조경연합회가 주축이 돼 세계조경가회의인 IFLA에 많은 활동을 했고, 조경올림픽인 IFLA 세계대회를 유치하겠다는 욕심을 갖게 됐다.

오휘영 회장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이를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내가 기억하는 일은 자메이카에서 열렸던 IFLA 총회다. 다음 대회 개최지 결정을 위한 모임이었던 그 회의를 우연히 내가 참석하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IFLA 세계대회 개최 후보지가 한국만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에서 튤립전시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네덜란드에서 대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한국 입장을 묻는 의장의 질문에 “한국은 몇 해 전부터 이 대회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고 준비완료”라고 주장했는데 결과는 한국 개최로 결정됐다.

물론 오휘영 회장과 임원들이 길을 다 닦아놓은 상태라서 잘된 것으로 기억한다. 조경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IFLA 세계대회가 열렸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한국조경사회의 규모가 커졌고 그만큼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앞으로 조경업계의 밝은 미래를 조경사회의 활동 속에서 볼 수 있어 뿌듯하다. 특히 IMF·외환위기 등을 잘 겪어내고 이렇게 발전해가고 있는 모습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조경분야 전문 인력이 매년 대거 배출되고 있음에도 아직 조경분야에 대한 국가 예산 범위가 작고 조경직 공무원 수도 적다는 것이다. 또 조경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범위를 확장시켜야 하는데 아직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되기도 한다.

조경분야 내부에서부터 토목과 건축 등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틀을 깨고 활동범위를 넓혀야 한다. 물론 30년전 보다는 업역이 많이 늘어나곤 있지만 예를 들어 식재를 위한 토공이나 관수시설 등 조경분야에서 할 수 있는 업역은 피해가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조경기법은 대부분 미국기법 서구식과 일본식인데 좋은 방향으로 많이 발전했고 선진 외래 기법도 좋다고 본다. 욕심 같아선 우리 한국의 조경 수준이 세계 상위 수준에 이른 만큼 외래기법에 한국고전미를 가미해서 한국식 조경으로 승화 시킬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영구(한국조경사회 제1기 부회장·현 트랜스코리아(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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